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살라흐 앗 딘 유수프 (문단 편집) ===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회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Saladin_and_Guy.jpg|width=100%]]}}} || || '''{{{#000 살라딘에게 항복하는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000 기 드 뤼지냥}}}]] }}}''' || 이후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었지만,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 Renaud de Châtillon. 불어식으로 르노 드 샤티용이고, 샤티용의 레이날드 혹은 레지날드(Reginald)라고도 한다.]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깨졌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 사실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의 잔당들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 기 드 뤼지냥을 석방했으며 내분이 일어났다. 또한 영국의 리차드1세와 프랑스의 필립2세가 공동 지휘관인 3차 십자군이 도착했는데, 리차드는 기를 지지하고 필립은 콘라드를 지지해서 내분은 계속되었다. 3차 십자군이 성지 회복에 실패하자 리차드는 자신이 단독으로 점령했던 [[키프로스]] 섬을 기에게 양도했고, 그 후손들이 키프로스를 계속 통치하면서 '예루살렘과 키프로스의 왕'이라는 직함만 유지했으며 후일 기의 후손들이 통치하던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멸망시킨다.] 그 여파로 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십자군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리처드 1세는 전략적으로도 상당히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으나, 다른 십자군 소속의 지휘관들은 그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도 어차피 고립된 상태에서는 이를 애써 회복한들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선 퇴각하여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려 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에 참여한 많은 지휘관과 기사, 병사들은 그런 리처드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